편지: 2015년 7월 21일 – 2015년 8월 5일 by scribe

김영나 모노그래프 [SET](2015)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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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2015년 7월 21일 – 2015년 8월 5일 

보낸사람: Wonhwa Yoon 
받는사람: Na Kim 
날짜: 2015년 7월 21일 오후 11:46

안녕하세요 

드디어 글을 써야겠다고, 어쨌든 시작은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영나씨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신작들을 확인했습니다. 2014년 작업들은 아무래도 커먼센터 전시 포스터가 많더라고요. 파티 포스터와 레이블 아이덴티티, 처음 보는 앨범 부클릿도 있었고요. 그런데 날짜 순으로 작업 기록을 넘겨 보다가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기시감이란 말은 적합하지 않지요. 이를테면 커먼센터 포스터들은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때그때 봤던 것들이고, 이미 본 것을 다시 봤을 때 느끼는 친숙함을 기시감이라고 부르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 친숙함에는 분명 시간을 거스르는 어떤 과도함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머지 않은 미래에,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시점에 이것들을 아카이브 전시의 형태로 또 보게 되리라는 느낌. 심지어 그 전시를 이미 본 것 같은 느낌. 

어쩌면 그건 제가 며칠 전에 보고 온 전시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서브컬처: 성난 젊음]이라는 전시였는데요.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홍대앞에서 출발한 인디문화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기록 영상과 인포그래피, 관련 인쇄물 컬렉션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영나씨의 [及ぼしoyoboshi미친다] 파티 포스터(2014)도 있었어요. 그때는 영나씨 작업이라고 크게 의식하지 않았지만요. 영나씨 작업 외에도 바로 몇 달 전에 본 파티 플라이어도 있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은 꽤 오래 된 공연 포스터들도 많았고요. 만약에 제가 그 공연들의 아주 열성적인 관객이나 심지어 관계자였거나, 혹은 반대로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백지 상태였다면 이 전시의 '내용'을 흥미롭게 따라갈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좀 애매한 거리에서 그 일들을 지켜봐 왔고, 그래서인지 내용에 집중하기가 어려웠어요.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공간들과, 매번 다시 시작되는 시작들. 그 속에서 시간은 자체적인 줄기를 뻗지 못하고 뚝뚝 끊어집니다. 전시에서 이 시간의 연약함은 박다함이라는 한 전시 기획자의 일생, 대중음악의 주요 흐름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간순으로 그어진 연표의 굵은 선들로 가까스로 지탱되지요. 그리고 그 사이에 '단명 자료ephemera'들이 낙엽처럼 내걸려 빈 칸을 채웁니다. 여기서 그래픽디자인은 이중으로 시간의 수호자가 됩니다. 원래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만 쓰이고 버려지는 공연 입장권이나 플라이어, 손으로 끄적거린 셋리스트 같은 것들이 소중하게 보관되어 지나간 사건의 기록 또는 증거로 제시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다시 말끔하게 디자인된 연표 형태의 인포그래픽 속에서 큰 시간의 벽돌이 되고요. 마술처럼, 시간의 풍경이 생성됩니다. 하지만 이건 정말로 마술이, 그러니까 환영이 아닐까요?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더 지나봐야 된다고들 하지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어떤 시간을 겪고 있는지, 어쩌면 지금의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지금의 시간을 낙관하기가 어렵습니다. 시간의 노선이 실체를 잃고, 기억하려는 사람의 회고적 시선 속에서만 가까스로 그 윤곽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 심지어 현재의 사건들이 어느 정도는 미래의 회고적 시선을 의식하면서 펼쳐지고 있다는 것. 이를테면 최근 미술이나 음악에서 사용되는 그래픽디자인이 현재적인 가장 최신의 것이 아니라 아카이브에 들어가기 위한 입장권처럼 또는 새로 만든 묘비처럼 보인다는 것. 저는 이 모든 것이 착시이기를 바랍니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에 수수께끼가 있다면 좋을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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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낸사람: Wonhwa Yoon 
받는사람: Na Kim 
날짜: 2015년 7월 27일 오후 11:39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메일을 읽고 그래픽디자인의 수명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디자인된 결과물의 수명이 짧아지는 현상은 아주 유서깊은 것입니다. 멀리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양피지 대신 종이를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시작된 일이겠지요. 정보 유통의 규모와 속도가 늘어나는 만큼 정보의 수명은 짧아지고, 그에 따라 특정한 정보를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한 그래픽디자인의 수명도 짧아집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장수 또는 불멸에 대한 열망이 (특히 책을 만드는 경우에) 솟아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적시성 또는 최신식에 대한 열망이 꿈틀거리는 것도 (특히 광고 포스터나 전단지 같은 이벤트 특정적인 인쇄물의 경우)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일이죠. 

적어도 20세기 그래픽디자인에서 이 두 가지 열망은 공존했습니다. 그리고 양쪽 모두 현재에서 미래로 펼쳐진 시간의 영토를 욕심내고 있었고요. 그들의 바람은 미래를 점거하는 것이었지 미래에 의해 기억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대다수는 미래를 점거하지 못했고, 망각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갓 발굴된 신선함으로 미래의 젊은이들을 매혹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것이 디자인의 역사가 디자인의 실무로 말려들어가는 첫 단계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과거의 디자인들은 흩날려간 파편의 형태로, 새로움 또는 적어도 다양성의 보고로서 발견됩니다. 그 다음 단계는 역사화되는 것이겠지요. 일부는 이름 있는 디자이너의 작품으로, 또 일부는 당대 문화의 익명적이고 생생한 기록으로,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절충적으로 종합되는 '디자인의 역사'라는 큰 이야기의 형태로. 이렇게 과거의 일부가 권위 또는 대표성을 가지고 일반 교양이 되기 시작하면, 그에 대한 다양한 전유와 변형이 가능해집니다. 

원래 이것은 과거 지향적 활동이라기보다 오히려 과거 착취적인 활동에 가까웠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이 현재적이었던 때에는 말이에요. 하지만 오늘날 그래픽디자인은 과거를 구성하고 재구성하는 일에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를 카탈로그 형태로 기록해서 과거의 영토에 진입시키고, 이미 카탈로그화된 과거들을 조합하고 재해석하면서 과거의 영토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지요. 그 범위는 넓은 의미의 문화사부터 좁은 의미의 디자인사까지 다양하게 설정될 수 있지만, 그래픽디자인이 과거의 문지기 역할을 맡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미술이 살아남는 방식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 시간이 얼마나 어떻게 더 지속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현재의 과거 참조적 작업들을 이해하기 위한 (필요하다면 그와 유사한 방법으로 작업하기 위한) 기본 레퍼런스로서 디자인의 역사를 가르치면서, 그런 과거에 대한 관심이 (또한 그런 과거에 기반한 작업에 대한 관심도) 해가 다르게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이 시간도 거의 끝나간다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이 이상한 시간이 어떤 방식으로 끝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이 아주 천천히 느려질지 아니면 갑자기 아주 새로운 망각이 덮치고 들어올지, 어쩌면 둘 다일지.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것은, 영나씨가 어느 정도 이 시간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기록하고자 하고 스스로 기록되고자 하는 것, 디자인 자체가 연속되는 기록을 이루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시간을 계속 전개시키고자 하는 것은 영나씨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대표적으로 과거의 사건을 알리는 포스터 연작 [기억의 표명](2009-11)이 그렇고, 개인의 아카이브 또는 컬렉션을 구성하는 워크숍 [당신의 자서전](2010)과 [컬렉션 쇼](2013), 미디어버스와 함께 진행한 전시 [완벽하게 사라지는 법](2013)도 생각나네요. 여기서 영나씨는 그래픽디자이너로서 기록과 정보 조직화, 아카이빙의 방법들을 시험합니다. 어쩌면 영나씨의 모든 작업들이 그래요. 

그런데 여기에는 어떤 희미함이 있습니다. 이는 애초에 작고 개인적인 것들,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무상한 것들을 기록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록과 후가공 과정이 이 희미한 것을 뚜렷하게 덧칠하기보다 오히려 희미한 것이 여기 있다 또는 있었다 라고 가리켜 보일 뿐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희미함 또는 '지나가 버림'의 상태는 연약하고 수동적인 상태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영나씨 본인을 기록하는 자화상 시리즈에서, 영나씨는 굉장히 공격적으로 또는 적어도 날카롭게 자신을 숨기고 그럼으로써 자신을 보존합니다. 처음에 [셀프 포트레이트](2011)나 [그룹 포트레이트](2011)에서는 단순히 디자이너 특유의 자기 비가시화 전략이라고 생각했지만, 가장 최근의 자화상인 [블루 프린트](2014)를 보면 애초에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에는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 200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이 시간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합니다. 작업이나 전시를 통해 이 시간을 복기하는 비슷한 나이대의 작가들도 (미술가와 디자이너 모두 포함해서) 종종 마주치고요. 저 또한 이 시간의 산물이고, 이 시간이 그냥 없었던 것처럼 잊혀진다면 조금 울적하기는 할 겁니다. 하지만 이 시간이 기억할 만한 어떤 강렬함을 남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 시간이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희미하고 갈팡질팡한 것이었다고 생각하고, 그걸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그동안 우리가 이런 걸 했고 이런 걸 좋아했다고 단순히 기록해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시간 속에 있었고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를 응시할 수 있었으면 하는 거예요. 저 개인적으로는 영나씨의 이번 전시가 이 문제에 대해서 무언가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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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낸사람: Wonhwa Yoon 
받는사람: Na Kim
날짜: 2015년 8월 5일 오후 11:36

안녕하세요 

작업의 방법에 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업 과정은 그 결과에 어느 정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긴 하지만 독자 또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어느 선 이상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죠. 영나씨의 방법은 (이것을 '디자이너 김영나'라는 정보처리장치라고 말해도 괜찮을지는 잘 모르겠는데) 독자적인 체계를 이루거나 어떤 보편적 체계(공시적이든 통시적이든)를 내재화한다기보다는 그 자체로 개인적인 수집의 질서를 이룬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테면 하나의 방을 상상할 수도 있겠지요. 혹은 여러 가지 기능들, 요소들, 구조들로 이루어진 아주 사적인 포토샵을 떠올릴수도 있을 거고요. 이 방 또는 장치가 수집의 완전성이나 분류체계의 필연성에 집착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임의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에 완전히 자신을 내맡기고 있는 것 같지도 않지만요. 영나씨라는 장치는 여기저기서 마주치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내뱉고 원래 모아 놓았던 것들과 다시 뒤섞으면서 스스로 구성되어 나갑니다. 결과적으로는 이 장치의 출력물뿐만 아니라 장치 자체가 어느 정도는 그 시간의 흔적을 각인한 일종의 기록이 되죠. 

그 기록은 쉽게 해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나씨가 작업을 할 때 (그럼으로써 자신을 구성할 때) 외부로부터 끌어오는 레퍼런스들은 한편으로 새로운 형태의 원재료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형태를 숨기는 카모플라주로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하거든요. 말 그대로, 사라지는 방법으로서. 물론 가까이서는 그 윤곽이 아주 잘 보이지요. 하지만 미래의 고고학자가 지난 백 년 동안 그래픽디자인의 지층을 탐사한다고 상상해 보면, 특히나 우리 시대에 다다랐을 때는 연대 구별에 무척 애를 먹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어느 정도는 아마추어 고고학자처럼 자신의 과거와 남들의 과거를 이리저리 짜맞추면서 무언가 찾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을 찾는 시간이었을까? 아마 답은 사람마다 많이 다를 겁니다. 그때 당시에 생각했던 것과 지금 생각하는 것은 또 다를 수 있고요. 어쨌든 이런 질문을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그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가버렸다는 뜻이겠지요. 

지나간 시간에 대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역사를 쓰는 것이나 역사의 일원으로 기록되는 것도 그 중 하나겠지요. 며칠 전에는 [와이어드]에서 쿠퍼휴잇디자인미술관의 컬렉션 전시 [포스터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소개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와이어드 트위터 계정에서 이 기사를 소개하는 트윗을 본 게 먼저였지요. "당신이 주목해야 할 9명의 신진 디자이너를 소개합니다"라는 문장과 함께 슬기와 민이 디자인한 안은미의 공연 포스터가 메인 이미지로 걸려 있었습니다. 

그 9명(또는 9팀)은 다음과 같아요: 익스페리멘탈 젯셋, 슬기와 민, 마크 고우잉, 펠릭스 패플리, 지안핑 헤, 시로 시타 사오리, 테세우스 챈, 필립 아펠로아, M/M(Paris).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 목록은 쿠퍼휴잇 디자인 컬렉션에 새로 포함되어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업들 중에서 컬렉션의 다양성과 최신성을 보여줄 수 있는 표본들을 추출한 결과였던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유망한 신입"이란 역사의 냉동창고에 이제 막 들어왔다는 뜻이죠. 하지만 이들이 "폴 랜드"나 "마시모 비넬리" 같은 "그들의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말할 때, 확실히 여기에는 가시가 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와이어드]에서 그래픽디자인 기사를 쓴다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요? 2015년에 [와이어드] 웹사이트를 뒤적거린다는 것, 그래서 "최신 기사"라는 항목 아래 "테크 타임 워프: 그 시절 테크업계의 뜨거운 라이벌은 아미가와 아타리였다" 같은 기사 제목을 본다는 것은 좀 눅눅한 경험입니다. 서로 빈정거려 본들 이기는 사람도 지는 사람도 없는 게임이에요. 이것도 우리의 시간입니다. 여전히 이 시간이거나, 혹은 급기야 이 시간이에요. 여기서 뭔가 지나간 것이 있다면, 글쎄요. 뭐가 지나간 걸까요. 

영나씨도 외부에서 작업 의뢰를 받았을 때 거기에 곧이 곧대로 부응한다기보다는 의뢰 자체를 하나의 기회로서 활용한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제가 이 글을 쓰는 방식도 그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올해 여름 서울의 타임라인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들이 마치 상관 있는 것처럼 아주 공교롭게, 그것도 아주 압축적으로 흘러가고 있어요. 지금 언뜻언뜻 보이는 것들이 그냥 지나가버릴 얼룩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크게 보일 것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저는 이 시간을 글로 꿰매어 놓고 싶었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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